공자가 사랑한 하느님-류영모저 박영호 풀이

2010.11.11 08:59

관리자 조회 수:109875

x9788991799547.jpg

저자 다석 류영모 (1890~1981)
다석 류영모는 불경, 성경, 동양철학, 서양철학에 두루 능통했던 대석학이자 평생 동안 진리를 좇아 구경각(究竟覺)에 이른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였다. 그는 우리 말과 글로써 철학을 한 최초의 사상가였으며, 불교, 노장 사상, 공자와 맹자 등을 두루 탐구하고 기독교를 줄기로 삼아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사상 체계를 세웠다. 모든 종교가 외형은 달라도 근원은 하나임을 밝히는 다석의 종교관은 시대를 앞선 종교 사상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890년 3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난 류영모는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배웠다. 그러던 중 한국인으론 첫 YMCA 총무를 지낸 김정식의 인도로 서울 연동교회 신자가 되어 16세에 세례를 받았다. 1907년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해 2년간 수학했으며, 1910년 20세에 남강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북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봉직하였다. 이때 오산학교에 기독교 신앙을 처음 전파하여 남강 이승훈이 기독교에 입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광수, 정인보와 함께 191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다. 1921년(31세)에 고당 조만식 선생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이 되어 1년간 재직하였다. 그때 함석헌이 졸업반 학생이었다. 1928년부터 YMCA에서 연경반(硏經班) 모임을 맡아 1963년까지 30년이 넘도록 강의를 하였다. 처음 세례를 받고 몇 년 동안 정통 기독교인이었으나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으며, 그 뒤로 교회에 나가지 않고 평생 성경을 읽고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 성경 자체를 진리로 떠받들며 예수를 절대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 석가, 공자, 노자 등 여러 성인을 두루 좋아하였다. 나아가 '노자(老子)' 를 한글로 완역하는 등 여러 성인의 말씀을 우리 말과 글로 알리는 일에 힘썼다.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하여, 한자를 쓰는 대신 옛말을 찾아 쓰거나 ‘씨알(민중)’ ‘얼나’ ‘제나’ 같은 말을 만들어 썼다. 류영모는 생활에서도 성인의 삶을 실천했다. 51세에 믿음에 깊이 들어가 삼각산에서 하늘과 땅과 몸이 하나로 꿰뚫리는 깨달음의 체험을 하였다. 이때부터 하루 한 끼만 먹고 하루를 일생으로 여기며 살았다. 세 끼를 합쳐 저녁을 먹는다는 뜻에서 호를 다석(多夕)이라 하였다. 얇은 나무판에 홑이불을 깔고 누워 잠을 잤으며, 새벽 3시면 일어나 정좌하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했다. 평생 무명이나 베로 지은 거친 옷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늘 “농사 짓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다.”라고 말했으며, 가족과 함께 직접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다. 1981년 2월 3일 18시 30분, 이 땅에서 90년 10개월 21일을 살다가 숨졌다. 생전에는 함석헌의 스승으로만 알려졌으나, 지금은 독특한 신관과 인생관을 지닌 철학자로서 다석 류영모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2005년에 다석학회가 만들어진 데 이어 2007년 10월 5일에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철학자들과 종교학자, 재야 학자들이 모여 ‘재단법인 씨알’을 만들었다.

풀이 박영호 (1934~ )
1934년에 태어난 박영호는 공업학교를 다니던 중 6.25가 일어나 열일곱 살에 헌병대에 징집되었다. 살벌한 전장에서 그는 죽이는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 죽은 사람을 수없이 목격하였다. 밤이 되어 눈을 감아도 해골과 시체들이 눈앞에 떠다녔다. 그렇게 신경쇠약에 걸려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며 방황하던 중 톨스토이를 알게 되었다. 그는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고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며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톨스토이 전집을 다 읽고 난 뒤 그는 우연히 <사상계>에서 함석헌 선생의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란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함석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톨스토이 사상에서 감화를 받은 사람임을 알아본 박영호는 곧바로 함석헌에게 편지를 쓰고 이후 40~50통의 서신을 교환했다. 1956년 천안에 농장을 마련한 함석헌 선생이 농사 짓고 공부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같이 지내자고 청하자 그곳으로 곧장 달려가 스승과 함께 생활하였다. 낮에는 과수원에 똥거름을 주고 밭을 매는 고된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성경, 톨스토이, 사서삼경, 고문진보, 간디 자서전을 같이 읽고 토론한 시간이 3년이었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농장에서 보낸 시간은 그에겐 영적으로 새로 나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그렇게 준비가 되었을 때, 그를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줄 새로운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1959년 함석헌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함석헌의 스승인 다석 류영모의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늘 “농사 짓는 사람이 예수”라고 말하며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던 다석 선생처럼 제자 박영호도 농사 짓는 일을 양심적으로 참되게 사는 유일한 길이라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는 경기도 의왕에 6천 평 농장을 개간해 밭을 일구면서 짬짬이 책을 읽고, 매주 금요일이면 서울 YMCA 연경반(硏經班)에서 류영모의 강의를 듣고, 댁으로 찾아가 다시 가르침을 받으며 5년의 세월을 보냈다. 1965년 어느 날 스승이 ‘단사(斷辭)’ 라는 말을 꺼냈다. 이젠 스승을 떠나 독립해 혼자 살아가라는 말이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스승을 떠난 그는 5년간 이를 악물고 혼자서 공부해, 정신이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을 세 가지로 정리한 그의 첫 책 '새 시대의 신앙' 을 출간했다. 그 무렵 류영모 선생으로부터 ‘졸업증서-마침보람’ 이라 쓰인 봉함엽서를 받았다. 다석 류영모의 참제자로 인정한 것이었다. 스승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했다는 확인이기도 했다. 그 뒤 류영모는 박영호에게 자신의 전기 집필을 맡겼다. 1971년부터 준비한 다석 전기는 1984년에야 책으로 나왔다. 스승이 읽은 책을 모두 독파하고, 스승이 살아온 이야기를 구술받고, 스승이 평생 써온 일지를 필사하면서 10년 자료를 준비한 후 스승이 돌아가신 1981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만 13년 만에 완성한 것이다. 박영호는 지금껏 다석 류영모에 관한 책을 열 권 넘게 써 스승을 세상에 알렸다. 류영모 전기인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외에도 '다석 류영모 어록''다석 류영모 명상록''다석 류영모의 얼의 노래''다석 마지막 강의' 등이 있고, <문화일보>에 다석 사상에 관한 글을 325회 연재한 후 이를 묶어 '다석사상전집'(전 5권)을 간행하였다. 또한 '잃어버린 예수 - 다석 사상으로 읽는 요한복음', '메타노에오, 신화를 벗은 예수', '다석 류영모가 본 예수와 기독교' 등을 썼다. 지금 그는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절실한 ‘다석 류영모 낱말 사전’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목차

  • ■ 머리말
    ■ 길잡이 말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13월
    ∙14월
    ∙15월
    ∙16월
    ∙17월
    ∙18월
    ∙19월
    ∙20월
    ∙21월
    ∙22월
    ∙23월
    ∙24월
    ∙25월
    ∙26월
    ∙27월
    ∙28월
    ∙29월
    ∙30월
    ∙31월
    ∙32월
    ∙33월

책속으로

  • 류영모는 한자 한 자 한 자 속에 철학 개론 한 권이 들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중(中)’은 깃대로 틀 가운데를 뚫는다는 상형 문자이다. ‘용(庸)’은 두 손으로 막대기를 들고 뚫고 올라가는 것을 나타낸 회의 문자이자 형성 문자이다. 낱동인 내가 온통인 하느님 속을 뚫고 올라가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것은 곧 내 맘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된다. 생각 속으로 들어가야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도 “하느님 나라는 너희 맘속에 있다.”(루가 17:21)라고 말하였다. ― 길잡이 말․39쪽

    마음속에 온 천명을 성명(性命)이라고 한다. 성명은 예수의 ‘영원한 생명’과 뜻이 같다. 유교에서 생명이라면 몸생명을 말한다. 예수가 말하기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요한 12:49∼50)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天命)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였다. 몸의 나는 나서 죽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이다. 그래서 류영모는 “나는 다른 것은 믿지 않는다. 하느님의 말씀만 믿는다.”라고 말하였다. ― 1월․45~46쪽

    공자의 인(仁)은 하느님의 생명인 얼씨이다. 얼씨가 말씀으로 사랑으로 나타난다. 충서의 충(忠)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고 서(恕)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충(忠)은 중(中)과 심(心)으로 하느님께 뚫린 마음이고 서(恕)는 여(如)와 심(心)으로 하느님과 같은 어진 마음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이다. 얼나로 거듭나지 않고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류영모는 충(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예수가 말한 ‘마음이 가난한 자’란 마음에 아무것도 없는 자라는 말이다. 지저분한 것이 도무지 없는, 가운데의 가운데, 속의 속을 충(忠)이라고 한다. 속이 비고 곧은 것이 충이다. 아직도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을 충으로 알고 있으면 이 시대를 밤중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임금 없는 세상에는 충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면 이는 아직 충이 무엇인지 생각지 못한 것이다.” ― 13월․151쪽

    “우리 눈앞에 영원한 생명줄이 아버지(하느님) 계시는 위로부터 끊어지지 않고 드리워져 있다. 영원한 그리스도란 이 한 생명줄이다. 불연속의 연속이란 말이 있지만 생명이란 불연속의 연속이다. 몸의 생명은 끊어지면서 얼의 생명줄은 줄곧 이어가는 것이다. 이 생명줄의 실이란 곧 말씀(로고스)이다. 생명줄로 나온 실이 말씀이다. 나는 다른 아무것도 믿지 않고 말씀만 믿는다. 여러 성현들이 수백 년 뒤에도 썩지 않는 말씀을 남겨놓은 걸 씹어봐요. 이렇게 말하면 종교 통일론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통일은 싫다. 귀일(歸一)이라야지 통일은 되는 게 아니다.”(류영모) ― 32월․459쪽 ~

출판사서평

  • 기독교와 불교와 유교의 가르침은 하나다!
    예수와 석가와 공자가 만나 ‘중용’을 이야기한다

    기독교를 큰 줄기로 삼아 유교, 불교, 노장 사상 등 동서고금의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어 독창적인 종교 철학의 체계를 세운 대사상가 다석(多夕) 류영모. 그는 성경 자체를 진리로 떠받들며 예수를 절대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석가․공자․노자 등 여러 성인을 두루 좋아하였다. 다석은 여러 동양 고전을 우리말로 옮겨 강의 자료로 썼으나 우리말로 완역한 것은 《중용(中庸)》과 《노자(老子)》뿐이었다. 《공자가 사랑한 하느님》은 다석의 직제자 박영호가 다석의 《중용》 번역과 강의를 바탕으로 삼아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쉬운 말로 풀이한 책이다.

    다석 류영모가 YMCA 연경반 등에서 행한 고전 강의에는 당대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열정적으로 참여해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다. 다석의 강의는 유교와 불교와 기독교를 하나로 모아 세움으로써 사상의 일대 장관을 만들어냈다. 독창적인 언어로 대자유의 세계를 구현한 다석의 사상은 한국 지식계에 저류와도 같은 영향을 끼쳤다.

    《공자가 사랑한 하느님》에는 공자의 유교 사상뿐만 아니라 불교, 기독교, 노장 사상을 포함한 종교 사상 전반에 대한 다석의 고유한 해석이 깊고도 풍부하게 담겨 있다. 예수와 석가와 공자가 한자리에 모여 앉은 듯, 《중용》을 주제로 삼아 동서가 회통하는 말씀의 향연이 펼쳐진다. 다석의 해석을 통해 공자는 하느님의 아들로 나타나며, 《중용》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드러난다. 동서 사상을 두루 꿰뚫어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종합한 대각(大覺)의 정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막힘없는 깨달음의 경지가 독특하고 생생한 언어로 솟아난다.

    동서고금의 많은 사상과 철학에 달통했던 사상가 다석 류영모는 매일 기록한 《다석일지》 외에 다른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현재 다석의 사상이 담긴 책들은 다석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다석의 가르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적은 기록이거나 해설서이다. YMCA 연경반 강의의 속기록 전문을 다듬은 《다석강의》와 금욕 수도 공동체 ‘동광원’에서 한 강의를 녹취해서 푼 《다석 마지막 강의》가 다석의 육성을 생생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이제 《공자가 사랑한 하느님》을 통해 다석 류영모의 독창적 유교 해석을 만나게 된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통해야 한다. 그것이 중용이다.”

    하느님 말씀이 곧 중용(中庸)이다
    다석 류영모는 공자의 말씀이 담긴 《중용》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읽는다. 다석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 곧 ‘중용’이라 하였다. 우리가 받은 본바탈(性)로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삶이 바로 중용인 것이다.
    다석은 제나의 감정인 희로애락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 다시 말하면 제나 너머의 얼나를 《중용》의 중(中)이라고 본다. 제나의 감정이 일어나도 얼나의 절제를 받으면 인격이 부드러워(和)진다는 것이다. 중(中)은 이 우주의 근본인 하느님이고 부드러운 이는 세상에 하느님이 계심을 증거하는 하느님 아들이다. 곧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天命之謂性率性之謂道)’가 중용의 뜻이다. 예수가 가르쳐준 “(하느님)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오 6:10)가 바로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와 같은 뜻이다. 이것을 더 줄이면 석가의 사성제 ‘고집멸도(苦集滅道)’가 된다.

    공자는 하느님 아들이다
    다석 류영모는 예수와 붓다를 모두 어리석은 욕망과 동물적 본능에 사로잡힌 ‘제나’를 벗어버리고 ‘얼나’로 거듭난 하느님의 아들로 보아 좋아하였다.
    그렇다면 예수, 석가와 함께 4대 성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공자는 어떤 사람인가? 다석은 공자도 예수, 석가처럼 얼나로 솟난 하느님 아들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보았다. 공자의 말씀과 몸가짐에서는 짐승의 냄새가 안 나고 진․선․미의 거룩한 향내가 난다.

    그 사람의 말을 알면 그 사람을 알게 된다. 공자는 사람으로서 꼭 들어야 할 말을 들으면 죽어도 좋다는 것이다(《논어》, 이인 편). 말을 알자는 인생이고 말을 듣고 끝내자는 인생이다. 한 사람의 총결산은 그 사람이 한 말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 너희들이 한 말이 너희를 판단한다고 했다. 그 말이란 우리 입으로 늘 쓰는 여느 말이다. 그 사람이 쓰는 여느 말이 그 사람을 판단하는 데 왼통이 된다. ― 길잡이말․15쪽

    예수와 석가와 공자는 하나로 통한다
    류영모는 평생 예수를 스승으로 섬겼으나 성경을 절대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인류 역사에 등장한 모든 성인들을 두루 좋아했다. 그는 성경과 함께 동서고금의 다양한 사상과 종교를 공부하고 일상에서 성인의 삶을 실천한 끝에 근본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생사(生死)와 애증(愛憎), 욕망의 노예인 ‘제나(自我, ego)’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인 ‘얼나’로 솟나야(부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류영모는 바로 이것이 예수와 공자, 노자, 붓다가 인류에게 가르쳐주려 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모든 성인들의 가르침은 하나로 통한다.

    주희가 입힌 겉옷을 벗겨내야 《중용》의 참뜻을 알 수 있다
    다석은 《논어》, 《맹자》, 《서경》 등 여러 유교 경전을 두루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중용》만 유일하게 우리말로 완역하였다. 그것은 다른 유교 경전과 달리 《중용》에 형이상학적 진리가 풍성하게 담겨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중용(中庸)’이란 말은 원래 공자의 말이 담긴 《논어》에서 처음 나왔다. 그런데 공자가 다녀간 뒤로 공자처럼 깊은 깨달음을 이룬 이는 맹자밖에 없어 중용의 뜻을 바로 아는 이가 드물었다. 더구나 ‘중용장구’라는 《중용》의 주석서를 쓴 주희는 ‘중용’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하여 공자의 사상을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그로 인해 《중용》에 담긴 형이상의 사상이 사라지고 인간사의 문제를 다루는 형이하의 사상으로만 전해지게 된 것이다. 주희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사고(思考)를 하느님에 맞춘 공자의 《중용》을 바로 알 수도 없고 바로 풀이할 수 없었다.

     

     

XE Login